자메이카 위인들

기억에 길이길이 남는 자메이카의 위인들

자메이카에서는 모두가 함께 일하는 공동체 사회를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 중 더 두드러진 몇 명의 자메이카인들이 현재의 독창적이고 정치적으로 활발한 자메이카를 만드는데 기여를 했습니다.


역사 초기

크리스토퍼 콜럼버스는 1494년 5월 4일 자메이카에 하륙했습니다. 그의 일지에 자메이카는 "본 중 가장 아름다운 섬. 산과 땅은 하늘에 닿는 것 같고…… 계곡과 들판, 평야로 가득찬 곳"이라고 표현되어 있습니다.

스페인 선원들은 자메이카에서 원주민인 타이노족을 찾았습니다. 그들은 이 땅을 "싸야마카 (Xaymaca)"라고 불렀는데, 이는 "물과 나무의 땅"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허리케인", "토바코" 또한 "바비큐"는 타이노족의 언어에서 나온 단어들입니다.

스페인 사람들이 섬에 유입되면서 수십만의 원주민이 감기와 같이 그들이 면역력이 없는 유럽의 질병에 감염되거나 강제 노동을 하다가 죽었습니다.

1509년도에 스페인 사람들은 오초 리오스 근처에 뉴 세비야 (New Seville)라는 이름의 수도를 세웠습니다. 스페인 사람들은 그 지역을 "폭포"라는 뜻의 라스 초레라스 (Las Chorreras)로 불렀습니다. 영국인들은 이를 잘못 이해해서 "여덟개의 강"으로 해석했고, 이것이 오초 리오스 (Ocho Rios)라는 이름의 기원이 되었습니다. 오늘날 뉴 세비야는 발굴 작업 중에 있으며, 이 연구의 일환으로 콜럼버스가 해변에 정박해둔 배를 찾고 있습니다. 스페인 사람들이 처음 세웠던 거주지도 찾고 있습니다. 자메이카 섬을 통치하던 150년 동안 스페인 사람들은 사탕 수수를 들여왔고, 그 이후에는 사탕수수 경작을 위해 아프리카에서 노예를 데려왔습니다.

1655년부터 자메이카를 지배하기 시작한 영국은 섬 전체를 커다란 사탕수수 농장으로 만들어버렸고, 농장주들은 큰 부자가 되었습니다. 영국에서 부자를 칭할 때 "서인도제도의 농부처럼 부유하다"라는 표현을 쓸 정도였습니다. 사탕수수를 경작하기 위해 서 영국은 더 많은 흑인 노예들을 자메이카 섬으로 이주시켰고, 그 중 대부분은 오늘날의 나이지리아인 아프리카의 서쪽 해안에서 데려왔습니다. 이에 해적들이 곧 자메이카 부근에서 활동하기 시작했고, 프랑스와 스페인 보물선을 공격했습니다. 이 캐리비안의 해적 중에는 웨일스에서 온 헨리 모건 (Henry Morgan)이라는 계약 노동자가 있었습니다. 모건은 이후에 자메이카의 부총독으로 임명되었습니다. 모건의 본거지였던 포트 로얄은 당시에 "가장 부유하고 사악한 도시"로 유명했는데, 1692년 일어난 지진으로 도시 전체가 해수면 아래로 가라 앉았습니다.

영국인들이 도착했을 때에, 스페인 사람들은 주변 섬들로 도망쳤습니다. 노예들은 산으로 도피해서 독립한 단체를 만들었고, 그들은 이를 "마룬 (Maroons)"이라고 불렸습니다. 시간이 지나며 영국인들로부터 도망친 다른 노예들도 마룬에 합류했습니다. 오랜 시간 동안 마룬은 그들을 다시 노예로 만들려는 영국인들과 싸웠습니다. 마룬의 맹렬한 저항으로, 영국인들은 마룬이 스스로 정부를 유지하도록 하고 그들이 사는 산을 더 이상 공격 하지 않겠다고 약속하는 평화 조약을 체결해야 했습니다. 도망친 노예들은 1739년도에 평화 조약이 체결될 때까지 여러 번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그 이후로는 자치권을 얻었으며 지금까지 유지하고 있습니다. 노예제는 1834년도에 폐지되었습니다. 노예 해방 이후에 경제적인 혼란이 많았지만 그 중에 가장 중요한 사건은 1865년에 발생한 모런트 베이 폭동 (Morant Bay Rebellion)입니다. 폴 보글 (Paul Bogle)이라는 침례교 흑인 집사가 킹스턴에 있는 부유한 사업가 조지 윌리엄 고든 (George William Gordon)의 후원을 받고 반란을 이끌었습니다. 둘은 사형을 당했으나 오늘날에는 자메이카의 국민 영웅으로 추대를 받고 있습니다. 그 이후에는 근대 자메이카가 지어졌습니다. 사탕수수 농장에서 일하던 인도와 중국의 이민자들은 급격히 다른 직업군으로 이동하기 시작했습니다. 이후, 유대인 이민자와 중동 무역상들이 자메이카에 찾아왔습니다.